여행수기 응모 시상식 및 최우수, 우수작품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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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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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수기 응모 시상식 및 최우수 및 우수작품 게시
여행수기 공모 최우수작
-이주형(홍익대 법학1)
6월을 기억하며
305호 홍익대 법학 1 이주형
날씨가 맑다. 더불어 아름답다.
기숙사에만 있기는 아쉽다. 나가보도록 하자. 옷을 입고 나간 그 날은 쨍쨍했다. 더불어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 오래전에 있었던 6월의 어느 날도 날씨가 쨍쨍했다는 것을 안다.
약간의 바람과 가벼운 발걸음 그리고 쨍쨍한 햇빛이 필요했던 나는 오늘 반드시 나가야 함을 직감했다. 이날에 나가기 위해 5월부터 준비하지 않았던가? 정확히는 남도학숙의 5월 18일 즈음에 로비에 쓸쓸히 틀어져 있던 비디오와 홀로 지키는 향초를 보고 나서 준비하였다. 이날 나가겠다고.
잿빛과 햇빛 사이에서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내려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버스를 타고 호남으로 내려가는 동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수많은 나무가 나뭇가지로 연대를 이루고 잎과 잎이 맞닿아 있는 사이에 초록빛과 바람의 속삭임은 나뭇가지들의 말로 표현하기 힘든 군무를 보여 주었다. 시간이 지나 노을이 질 때만 볼 수 있는 저녁 들녘을 바라보며 벼 사이사이의 작은 빛남을 감상하며 마치 가을 추수를 해야 할 시간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노을은 나의 호남 방문을 환영한 듯 산과 산 사이를 지나갈 때 산에 걸쳐 앉아서 나를 바라봐 주었다. 덕분에 노을과 마주 보며 이야기를 하며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도착 직후 아버지에게 5.18 묘지로 가자고 했다. 집에서 차로 30분 즈음 걸리는 성지. 5.18 묘지. 가장 가까운 곳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로 앞에 있는 묘소로 갔다. 거기에는 갈 때마다 항상 인사드렸던 이한열 열사가 있었다. 아쉽게도 노을이 머무르는 시간이라 꽃집이 문을 닫았다. 대신 묘를 정리했다. 짙은 잿빛 비석 사이에서 빛나는 붉은 빛은 오래전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같이 불렀다던 노래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였다. 언제나 비석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만 있어야 하는 이한열 열사 묘소 앞 태극기. 영원히 조의를 표해야 하는 시간이 멈춘 공간 이다. 그 공간을 뒤로하고 그날의 일정이 끝이 났다. 노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지배하는 시간. 집에 가는 동안 사색을 한다. 내 앞의 커다란 나침반이 있는 상상. 스스로 계속 질문하는 나. “선택은 언제 할 건가” 도착하여 짐을 풀고 책상 앞 의자에 앉는다. 생각하다가 멈추었다. 더 정확히는 멈춤을 당하였다가 올바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눈앞에 내 생각을 멈추게 한 것은 책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의 책장에 가까운 곳에 꽂혀있던 책이었다. 대한민국헌법.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만 주 이념을 계승하고 헌법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이튿날, 광주 시내로 출발했다. 삐걱삐걱 시골버스를 타고 정리가 잘 안 된 시골 길을 지나 곧 광주로 진입했다. 광주에서 맡은 자유의 공기는 피곤함을 날리기에 충분했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면서 구 전남도청 앞에 멈추었다. 총탄을 품고 있는 잿빛 건물. 그리고 부끄럽게도 움직이는 과거의 잿빛 시계탑이 있었다. 하늘은 너무나도 맑았다. 가슴이 아플 만큼.
이곳에는 교과서에서 보던 분수대가 있다. 모든 걸 지켜본 분수대가 고장 난 체 있다. 분수대를 생각하며 분수대는 시대가 고장 난 것을 알고 스스로 작동을 멈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루빨리 다시 작동되기를 소망하며 자리를 떴다. 버스를 타며 다시 집으로 가는 길 햇빛은 차창에 빛을 주었다. 노을빛. 약간 으깨진 버스 차창으로 새어 나오는 빛은 오래전 자유의 총탄이 지나간 길처럼 보였다. ‘햇빛은 시대를 기억하고 있는가…. 부끄럽지 않은가 잿빛아, 부끄럽지 않은가 햇빛아, 나는 부끄럽지 않은가?’ 속으로 말하는 때에 나 스스로 대답을 듣지 못하고 지에 도착하고 말았다.
물의 전주곡
며칠 뒤에 서울로 돌아오며 헌법전문을 읽으며 다짐하였다. 아직 여행이 끝나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바람에 차창의 풍경은 감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고도의 정적 상황은 책을 읽기에 충분했다.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읽은 부분.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귓가에 맴도는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 약간의 어지러움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로 간다. 세수한다. 물이 눈에 들어가고 머리카락을 살짝 적신다. 뺨에 머무르는 물방울. 다시금 눈을 감고 물을 얼굴에 적신다. 코로 물이 들어갈 때의 아픔. 그때 문득 든 생각은 ‘탁치니까 억’ 하고 였다. 물방울이 떨어지며 물의 표면에 닿는다. 물방울이 자기를 희생하면서 나오는 파동. 물의 전주곡. 연주가 시작한다.
광주에서 출발한 기차는 용산역에 도착한다. 용산역에서 조금만 가면 대방역이다. 그리고 그 정도 만큼 반대로 가면 남영역이 나온다. 학숙에 도착하고 정리를 하고 학숙건물 밖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여름을 보고 있었다. 그때 몰랐던 사실을 알았는데 벤치 옆에 무궁화가 서 있었다는 것이었다. 무궁화. 우리나라 꽃. 남궁억 선생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나는 어릴 때 무궁화를 자주 보지 못했다. 주변에 무궁화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학숙에 간간이 무궁화가 서 있는 것을 보며 출발준비를 했다.
대방역에서 라면 먹을 시간 정도를 투자하면 남영역에 도착한다. 남영역에 내리니 어두침침함이 나의 마음을 압도했다. 낮 속의 어둠. 역사 안에 있어서만은 아니니라. 남영역 근방에는 박종철 기념관이 있다. 공권력의 고문이 있었던 경찰서. 그곳은 이제 박종철기념관과 경찰 인권 센터로 변해 있었다. 보도블록을 따라 아스팔트를 따라 기념관에 가는 동안 보도블록 사이 좁은 틈을 비집고 나와 자라나는 풀을 보았다. 자연스레 경건해진다. 높고 어두운 색깔의 담벼락을 지나며 충분히 이 건물이 기념관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높고 어두운 담벼락 꼭대기에는 모나고 오만하게 서 있는 쇠 철사가 엉켜있었다. 지난 5공화국의 도덕성을 보는 듯했다. 기념관 내부 1층은 영상과 사진들로 가득하다. 눈에 띄게 볼 수 있는 것은 ‘이제는 여기가 인권센터로 변했다.’ 웃고 있는 경찰의 모습과 아이들의 웃음을 보며 미소의 원동력은 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잠깐 구경하고 곧 구 조사실로 갔다. 오래전의 모습을 완벽히 복원해 놓은 그곳은 완전한 적막 자체였다. 고도의 정적 상황. 여기에서 유일한 역동성은 물 뿐이었으리라 느낄 수 있었다. 빛조차 가두어져 있는 가혹한 환경. 각 문이 비대칭으로 되어있어 문을 열면 보이는 것은 암울한 시대의 벽뿐이었고 실제로 심리적으로 척박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문의 설계부터 자살할 수 없을 정도로 얇고 긴 창문, 층별로 층수를 적지 않아 몇 층인지 알 수 없게 했으며, 계단의 문과 조사실의 문을 같게 하여 어느 것이 출구로 가는 길인지 알 수 없게 되어있었다. 모나고 오만한 철사가 나를 감싸듯 나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간신히 박종철 조사실로 들어왔다. 아주 작은 방. 5공화국의 도덕성의 총체인 책상과 욕조와 변기 세면대. 그곳은 책상마저 불편하고 구역질이 나는 물건이었다. 아주 이질적인 책상. 중앙에 있는 박종철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영정. 그리고 동기들의 깃발과 편지 같은 것이 있었다. 물기 하나 없는 세면대, 욕조, 변기. 마치 약속을 한 듯. 아무 물도 없었다. 야속할 정도로 눈물 하나 없었다. 감히 수도꼭지를 만지지 못하고 물 없는 세면대에 손을 넣었다. 물은 확실히 없었다. 하지만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것은 감히 마음의 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물을 세면대에 담고 욕조에 담는다. 나의 양심에 물을 적신다. 몸과 마음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도 나는 전주곡을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물방울 대신 온몸이 희생하여 만든 인간의 전주곡을 알고 있다. 박종철의 물의 전주곡 1987년 1월 14일 시작.
명동 푸른하늘 아래에서
화려한 불빛 높게 솟은 건물들, 회사의 본사들이 많이 있는 명동. 그건 건물들 사이에서 별로 높지는 않으나 나의 눈에는 무엇보다도 높게 보이는 건물이 있다. 오래된 사찰의 나무처럼 역사를 품은듯한 고목의 색깔을 나는 명동성당에서도 볼 수 있었다. 중앙의 유리 창문은 나의 가슴을 비춰주었고 정화가 되는 듯했다. 높게 솟은 첨탑의 끝 세상의 빛을 모으는 공간인 듯한 십자가는 건축가의 고뇌를 상징하는 듯하였다. 명동성당의 모습에 압도당하여 한동안 나는 우두커니 성당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서 중앙의 복도를 기준으로 끝의 벽에 있는 아름다운 색깔유리는 성인의 양심을 합쳐놓은 듯했다. 반 빛 불의의 푸른 빛처럼 춤을 추는 듯했던 스테인드글라스의 반짝임. 그것은 분명 양심이었다. 반짝임 속에서 나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아니 기억할 수 있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는 오래전 여기서 울려 퍼진 소리. 아주 맑고 깨끗하며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럼 없이 부드러우며 날카로웠던 그 소리는 적어도 사람이라면 들을 수 있는 소리였고 잊고 있었던 기억을 일깨워주는 데 충분했으며 양심을 부활시키기에 충분했다. 1987년 명동성당에서 광주항쟁 7주년 미사가 열렸다. 날짜는 5월 18일이었다. 정의구현 사제단은 박종철 사건에 대해 폭로를 했다. 양심이 사라져 버린 사회. 양심을 숨겨야 그나마 숨이나 쉴 수 있었던 사회에서 울려 퍼진 양심의 소리의 현장에 와 있다. 시간이 멈춘듯한 나무의자와 벽돌들은 빛의 힘으로 정지된 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일하게 누렇게 바랜 책만이 시간이 지났음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성당에서 나와 나는 성당의 뒤로 갔다. 모든 이를 품을 수 있는 듯한 성모마리아 상은 나의 눈에 얕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석상을 보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촛불이 불타고 있었다. 꽤 많은 촛불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촛불은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였다. “너의 마음은 촛불보다 못하지 않는가?” 약간의 욱신거림을 느끼며 석상에서 멀어지기로 했다. 성당의 뒤쪽 석상으로 가는 중간. 밑으로 나 있는 작은 문이 있다. 고해성사하는 곳. 그곳을 바라보며 지나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성당을 뒤로하고 나가는 길. 약간의 언덕이 져 있다.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며 오래전 아주 많은 학생이 이곳에 서서 또는 앉아서 가끔은 누워서 밤을 지새우며 역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안개 도시와 코러스
날씨. 해가 쨍쨍 내리던 날도 그 해는 날씨는 차마 맑았다고 할 수 없었다. 시대를 잘 못 만나서 아무리 날씨가 맑아도 곧바로 흐려졌다. 도로를 뒤덮는 자욱한 최루 연기 속에서 사람들이 팔을 엮어 서 있다. 자동차는 서행하고 시간 맞추어 경적 울리던 그 날. 그날은 지하철도 그냥 지나쳤다. 회사도 일찍 끝났다. 학교도 일찍 끝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집에 가지 않았다. 이때의 모든 순간이 시공간이 역사로 기록되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여행의 막바지로 가고 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기 위해서는 방문해야 할 곳이 있다. 신촌. 마침 학교 갈 일이 있어서 신촌으로 가야 한다. 기쁜 마음으로 버스를 탄다. 빠르게 여의도를 통과하는 153번 버스. 높게 솟은 건물들이 즐비한 여의 대로에서 나는 오래전의 흔적을 찾고자 한다. 아주 가끔 낡은 건물이 보이고 나머지는 모두 씁쓸한 찬란을 보여준다. 여의도 내에 있는 지하도를 지나면 국회가 바로 보인다. 푸른 돔 모자를 쓰고 오랜 기간 자리를 지켜온 국민의 장이다. 국회를 끼고 있는 도로에는 언제나 태극기가 즐비하다. 수만은 태극기의 펄럭임을 바라보며 나는 태극기에 묻는다. ‘너는 떳떳한가?’ 태극의 깃발 아래 있었던 수많은 일을 기억하며 나는 국회 도로를 빠져나온다. 학교의 일을 마치고 나는 연세대를 방문했다. 연세대 정문에서 오른쪽을 바라보면 검은색 비석이 하나 있다. 이번 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이한열 열사 기념비. 나는 학기 초 기념비를 세우고 며칠 뒤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일을 생각해본다. 우연히 이한열의 선배를 만났다. 아버지뻘 되는 시대의 풍파가 지나간 주름을 보며 나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래전 6월에는 맑은 날은 더욱더 안개처럼 자욱해졌다고 한다. 맑은 날은 사람들이 모이기 쉬워서 집회 인원이 늘어났고 그로 인해 진압이 과잉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로비에서 화염병을 만들고 실어 날랐다는 이한열의 선배 말은 생생했다. 정문까지 진격한 전경의 무리와 대치 전선을 이루는 학생들의 모습. 전국으로 작은 종이가 뿌려져 내리는 마치 6월의 눈처럼 보이는 종이는 6월의 이야기를 마칠 준비를 하는 종이었다. 시민주도의 평화시위를 위해 준비하는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이 모여 안개 도시를 몰아내기 위하여 팔과 팔 사이 공간을 빈틈없이 스크럼을 짜고 연대하였다. 5공화국은 택시와 버스 기사들의 크락션 시위가 무서워서 그날은 차의 크락션도 때고 운행을 나가게 했다. 정각의 때맞춰 울리는 크락션과 함성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러스가 아닌가 싶다. 나는 연세대의 노천극장을 지나 하나의 큰 바위 앞에 섰다. 나는 이것을 양심이라고 부르고 싶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많은 사람이 이 글귀를 보고 도로로 나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서 있다가 전경들이 오면 봄날의 벚꽃처럼 흩어지고 여름의 나뭇잎처럼 다시 무성히 다시 모였다. 노천극장에서는 흩어질 당시의 물품들의 주인을 찾아주는 일을 했다. 어느 날은 신발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푸른색 신발은 주인을 찾았으나 주인은 신발을 찾지 않았다. 신발의 주인은 침실에 누워있었다. 이한열. 신발 주인. 이한열 열사의 희생으로 코러스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안개도시를 만들 수 있는 최루탄은 모두 떨어졌다. 안개도시는 이제 없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이한열 열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이한열 기념관에 들러 열사가 공부했던 책상과 책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푸른색의 신발을 보며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자신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대답을 하니 가슴을 무한히 짓누르던 것이 편안해졌다. 건물을 나서며 날씨는 오늘도 맑았다. 안개는 없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선다. 세상으로.
6월을 기억하며.
여행수기 공모 우수작
-최준혁(서울대 건설환경공학2)
가난한 4명의 후쿠오카 여행기
서울대 건설환경공 2학년
467호 최준혁
지난 8월 19일부터 22일까지 일본 규슈로 자유여행을 떠났다. 평소 자주 모이기 힘들었던 고등학교 친구 4명이어서 갔다 온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가격이었다. 친구들이 돈이 많이 없어서였는지 최대한 싸게 가자고 주장했고, 나 또한 겨울방학 해외여행을 다녀오면서 어떻게 하면 가격을 줄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산큐패스라는 기간제 버스 이용권을 미리 구매하고, 숙소 또한 예약하여 가격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특히 일본으로 가는 배편을 예약하면서 특가에 구매하여 인당 5만 원에 왕복으로 후쿠오카를 다녀올 수 있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치면 여행을 갈 곳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된다. 규슈가 어떻게 생겼는지, 주요 도시의 위치와 관광지,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그래도 일본 온천에 가보고 싶어 유후인의 숙소를 예약하였다. 일본에서 세 번째로 많은 용출량을 자랑하며, 아기자기한 상점과 시골 마을 같은 자연이 있는 곳이다. 비록 남자 4명이었지만 알차고 낭만적인(?) 여행이 되기를 기대하며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19일 저녁 7시에 배를 탔다.
● 1일 차
배를 탄 후 우리는 목욕을 하고 야식을 먹었다. 7시 승선이었지만 출발시각은 11시라 오랜 시간 동안 부산항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동안 배 밖에서 부산 야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부산야경을 보며 일본 맥주와 안주를 친구들과 먹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남자 네 명이 모여 대부분 여자 이야기나 게임 이야기였지만 이만큼 재미있는 주제가 있을까.
배 안에서 잠을 잔 후 다음 날 아침 7시에 배에서 내렸다. 후쿠오카를 본격적으로 처음 마주한 것은 하카타역으로 가는 버스였다. 일본의 버스는 생김새도 물론이고, 분위기, 운전방식도 우리나라랑 많이 달랐다. 먼저 뒷문으로 타고 앞문으로 내리는 방식이며, 좌측통행 국가인 만큼 문도 반대방향이다. 버스는 버스정류장에 정확히 정차한 후 문을 연다. 우리나라처럼 두 대가 동시에 문을 열거나 버스정류장 멀리서 문을 열어 달려가는 일은 없다. 장점이라면 질서정연하고 달려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단점이라면 버스가 많이 밀리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신기했던 점은 신호등에서 정차 시 버스가 시동을 끈다는 점이었다. 그 때는 깊은 정적이 흘렀다. 우리나라랑은 달리 질서정연하고 조용했다.
하카타역에 도착한 후 우리는 캐널시티로 걸어가기로 했다. 캐널시티는 후쿠오카의 큰 종합 쇼핑몰이다. 필자는 많이 피곤해서 벤치에 앉아 쉬었고, 친구들은 반바지, 피규어 등을 샀다. 인상 깊었던 곳은 피규어 샵이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런 피규어들이 큰 규모의 상점 안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 일본 라면과 타코야끼를 먹어보았다. 일본 라면은 약간 느끼했다. 이때부터 한식 생각이 많이 났던 것 같다.
캐널시티에서 벤치에 앉아 쉬고 있을 때, 옆에서는 소방훈련이 진행 중이었다. 일단 일반 쇼핑몰에서 소방훈련하는 것을 처음 보아 신기했고, 우리나라와는 달리 모든 사람이 소화기를 써보는 등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몇백 년 전만 해도 일본은 우리나라를 통해 문물을 전달받았던 국가였지만, 현재는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이러한 모습을 보며 발전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었고, 철저함이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 같았다.
하카타역으로 돌아온 후 고속버스를 타고 유후인으로 갔다. 우리나라의 시골 마을과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온천들, 상점들이 만화에 나오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유후인의 경우 저녁 5시가 되면 가게 문이 대부분 닫혔다. 밤에 활발한 우리나라와는 다른 점이었다. 산책한 후 저녁에 달을 보며 노천온천을 하였다.
숙소에서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방에서 이야기 하는 도중 친구가 밖에 나갔다. 그때 우리는 약간의(?) 술을 먹고 무서운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친구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친구가 밖에 나가 주인에게 “원 미스!”를 계속 외친 것이 기억이 난다. 다행히 친구는 공중화장실에서 오랫동안 볼일을 보고 있었다. 일본에서의 첫 번째 날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림 부산항, 그림 피규어 샵, 그림 일본 라멘, 그림 유후인 산책, 그림 유후인 맛집
그림 온천 후 친구들과(사진생략)
● 2일 차
일어난 후 아침 목욕을 하였다. 그다음 어제저녁을 먹은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11시 30분 버스를 타고 다시 후쿠오카로 돌아오게 되었다.
우리는 다자이후 텐만구 라는 일본 신사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타게 되었다. 신사에 도착하기 전 우리는 한민족의 얼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신사 내에서 절대 손을 모으거나 허리를 숙이지 않기로 하였다.
다자이후 텐만구는 학문의 신을 모시는 일본의 몇 안 되는 신사라고 한다. 들어가기 전 손을 씻는 곳이 있었고, 아름다운 연못이 어우러진 사원이었다. 사원 내부로 들어가 기도하는 곳 근처로 가보았다. 절과는 다르게 불상 같은 조각상은 없었으며, 잘 꾸며진 빈 의자가 놓여있었다. 그곳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신사 앞에는 황소 동상이 있었다. 이 황소 동상의 코를 만지면 머리가 좋아지고 학업 운이 좋아진다고 한다. 다자이후의 일본원숭이 공연을 못 봐서 아쉽기는 하였지만 다른 나라의 사원을 보는 좋은 기회였다.
후쿠오카로 다시 돌아오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숙소에 다시 들러 우산을 들고 후쿠오카 타워로 출발하였다. 후쿠오카 타워는 234m의 높이로 올라가서 도시의 전경을 볼 수 있는 타워이다. 우리가 올라갔을 당시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고 있고, 해가 아직 지지 않아 멋있는 광경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우리는 비가 그래도 줄어들고 있고, 해도 지고 있어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오랜 기다림의 보상이었는지, 비는 그쳐 하늘이 개고 불이 켜져 후쿠오카의 멋진 야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후 숙소에 돌아가 피곤한 우리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그림 텐만구 사진, 그림 텐만구 입구, 그림 후쿠오카 시내, 그림 후쿠오카 전경, 그림 후쿠오카 타워
그림 후쿠오카 야경(사진생략)
● 3일 차
마지막 날 우리는 일어나서 숙소를 나섰다. 우리는 남은 동전을 모두 사용한다는 원칙 아래에 여비를 해결하기로 했다. 먼저 아침을 먹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하카타국제여객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서 배를 기다리며 기분이 참 묘했던 것 같다. 앞으로 한국에 다시 돌아가면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생각하며 작은 다짐을 했던 것 같다. 필자는 출국 절차를 밟은 후 면세점에서 바나나 빵을 구매 후 배를 탑승하였다. 우리는 배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왠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설레었던 순간이었다. 아마 일본에 도착할 때보다 더욱 설레었다.
한국에 도착 후 우리는 마지막으로 국밥을 먹기로 하였다. 4일 만에 먹는 한국 음식이라 매우 맛있었다. 이번 여행은 일본에 대해 알아가는 동시에 고향인 한국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여행이었던 것 같다.
그림 단독 사진, 그림 단체 사진 1, 그림 단체 사진 2(사진생략)
● 느낀 점
이번 여행을 통해 가장 먼저 우리나라와는 다른 일본의 국민성을 볼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예의 바르고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모습을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볼 수 있었다. 특히 버스나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매우 조용한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도시 내 상업지역 또한 호객행위가 별로 없어 음악 소리가 많이 들렸던 것 같다. 거리는 물론 매우 깨끗했다.
이것 외에 많은 모습에서 사실 부정적인 면 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많이 본 것 같다. 비록 식민지 지배라는 아픈 역사가 있지만, 우리보다 먼저 선진화를 이루어내고 더 발전되어 있는 만큼 시민의식, 철저함 같은 배울 점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다양한 나라의 좋은 점을 본받으려 노력한다면 대한민국도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꼭 안 좋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는 다른 활발함, 열정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조용하다면 대한민국은 활발한 것 같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며 이러한 분위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 것 같다.
여행수기 공모 우수작
-김용민(중앙대 정치국제3)
인생 여정 이야기
(2박 3일간의 동해안 일주)
내 삶에서 언제부턴가 혼자만의 자전거 여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듯 하다. 무엇을 얻기 위함일까? 단순히 목적의식으로 하기엔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나만의 인생여정이라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스물 일곱의 인생여행, 대한민국에서 스물일곱으로 살아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3포 세대라는 말을 넘어 7포 세대라는 말이 유행가처럼 번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증명하듯, 어딘가에 있을 지 모를 희망이라는 끈을 잡기 위해 오늘도 고시원으로, 도서관으로, 그리고 차가운 냉대와 지옥 같은 진흙탕 노동현실 속에서 허우적대며, 벗어나 보고자 안간힘을 쓴다. 이런 진흙탕 현실에서 여행이란 단어는 어느덧, 사치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그 사치를 쫓아 벌써 홀로 기나긴 여정을 즐긴 지도 2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처음 자전거 여행에 빠지게 된 건, 그저 단순한 이유였다. 2년 전 홀로 비행기를 타고 먼 타국으로 떠난다는 것을 상상도 해보지 못한 내가, 큰 결심을 안고서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1년여 간의 일정, 모든 것이 쉽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전환기이자 내 삶에 후회를 남기고 싶진 않았다. 결심이 흔들리던 차에 선택한 것이 자전거 여행이었다. 호주로 떠나기까진 한달 여의 시간이 남아있었고, 전국 일주를 목표로 한달 동안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턴 생활과 아르바이트로 차곡차곡 저축한 돈은 호주행 티켓과 여비를 위해 남기고 쓰고 나니, 내 손에 쥐어진 건 고작 10여 만원이었다. 고작 10여 만원으로 어떻게 한달 여간의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난 사람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강해진다고 믿는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현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방법을 발견했을 때, 진보라는 대가가 온다고 믿는다. 비록 내겐 10여 만원이란 돈 뿐이었지만, 어떤 역경이든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여행은 인천을 출발하여 춘천, 충주, 대전, 목포, 그리고 부산까지 2000km가 넘은 길을 달렸고, 여행 기간 동안 때론 다리 밑에서, 때론 버스정류장에서 쪽잠을 잘 때도 있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결국 전국일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8월 2일,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버스에 오르던 동서울터미널의 한구석에서, 나는 조금 특별한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삼척시 끝자락에 위치한 임원까지 240KM를 달리는 여정이었다. 이른 시각이었지만, 터미널엔 이미 수많은 여행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붐비는 인파를 피해 터미널 한구석에서 자전거에 걸쳐 앉은 채 간성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버스가 들어왔지만 문제는 자전거를 가지고 가려는 사람들이 8명이나 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몇대씩 포개서 실어야했는데, 나와 함께 실은 노신사분은 자전거에 흠집이 나진 않을까 내게 짜증을 내는 게 아닌가! 기분 좋게 출발하려던 마음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겨우 자전거를 싣고 드디어 출발했다. 간성까지는 4시간이 넘는 먼 곳이었다. 그래도 2시면 도착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중간에 버스 기사분이 1차선 도로로 길을 잘못 들어가 10여분을 후진해서 나오는 진풍경을 겪은 후에야 2시가 넘은 시각에 도착하게 되었다.
도착한 간성터미널은 정말 초라했다. 터미널이라기 보단 그냥 공터에 가까웠다. 어쨌든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고 자전거를 꺼내어 첫 여행지인 통일전망대로 향했다. 10여분을 달려 도착한 통일전망대에는 이미 많은 인파들이 북녘 땅을 보기 위해 출입 신고를 하는 중이었다. 마음 같아선 자전거로 북한을 향해 더 가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하기만 했다. 이러한 현실의 장벽은 여행 내내 내 마음을 개운치 못하게 했다. 대한민국 최북단에 위치한 명파 해수욕장에서부터 동해안을 달리는 내내 철조망의 모습은 사라질 줄 몰랐다. 벌써 남북이 분단 된지도 70년이 되어간다. 6.25전쟁이 일어났던 그 때, 과연 오늘날까지 분단의 아픔이 지속될지 누가 알았을까… 그러면서도 철조망 너머로 바다의 수많은 인파들과 이들을 바라보는 군인들의 모습은 남북의 첨예한 대치속에서 전쟁의 위협을 애써 외면한 채, 평화를 누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싶었다.
초도항, 호주에서 지낼 때, 가장 부러웠던 건 다름아닌 바다였다. 눈부신 에메랄드 빛 바다, 마치 수족관을 보듯 물살에 이리저리 춤을 추는 미역 줄기와 산호초 사이에서 빼꼼이 고개를 내민 고기들의 모습마저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호주의 바다였다. 그런데, 한국에도 이런 바다가 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 강원도 고성군 초도리에 위치한 초도항에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아직 갈 길이 바쁘기에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초도항을 지나 속초를 향해가고 있던 차, 멀리서 익숙한 뒷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간성행 버스에서 만났던 아저씨였다. 풍채가 꽤나 있으셨지만, 선한 인상을 가지신 분이었는데, 서로 홀로 여행하고 있었기에 함께 달리기로 했다. 안산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아저씨는 확실히 직장인이라 그런지 나보다 몸이 가벼웠다. 작은 자전거에 텐트며, 가방이며 주렁주렁 매달고 달리는 나와는 달리 아저씨는 그저 맨몸에 물통뿐이었다.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큰 물통에 담긴 얼음물을 권해줬을 때, 눈물이 날 정도였다. 하긴 이 더위에 자전거 타는 자체가 불쌍하긴 마찬가지긴 하지만…
아저씨와 함께하는 라이딩은 오래 가질 못했다. 아저씨 체력이 그리 좋지 못한 탓에 나를 먼저 보냈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소나무로 둘러싸인 송지호를 거치고 나니 한낮의 햇볕이 나를 괴롭혔다. 자전거 쉼터에서 잠시 눈을 붙였는데 깨어보니 시간은 벌써 5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날이 지기 전 조금이라도 더 가야만했다. 서둘러 출발하는데, 저 멀리서 또 익숙한 뒷 모습이 보였다. 인상 좋은 아저씨였다. 그렇게 아저씨와 재회하고 우린 봉포해변까지 내달렸다.
도착한 봉포해변에는 하트 모양의 펜스가 유명한 곳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이것도 인연이겠다 아저씨와 부끄런 하트샷을 찍어야했다. 이건 지극히 아저씨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다시 출발하려는데 이번엔 반갑지 않은 인연을 만났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이기적인 행동으로 기분을 망치게 만든 노신사였다. 원래 일행이 있었는지 한 분 더 같이 계셨다. 난 애써 무시하고 가려던 차에 아저씨가 같이 가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되었다. ‘악연도 인연이라고 했던가’ 사실 첫인상이 사람을 판단하는데 있어 중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첫인상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동행하는 내내 노신사분은 분위기를 주도하셨다. 연세는 지긋하셨는데, 이런저런 농담으로 힘들 때마다 웃음을 주셨고, 자전거 여행도 많이 해보신 덕분에 많은 여행 이야기며, 인생 이야기들을 엿들을 수 있었다. 첫인상만 생각하고 행동했더라면 결코 이어질 수 없었을 인연이었을텐데,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기회였다.
하지만 우리의 동행을 오래가지 못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고, 각자 숙소를 찾아 떠나갔다. 하지만 난 여전히 달려야 했다. 아직 속초 땅에도 들어서지 못한 까닭이었다. 한참을 달려 7시를 넘겼을 때 겨우 4번째 목적지인 속초 영금정에 도달했다. 영금정은 석벽에 바닷물이 부딪힐 때면 신비한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가 거문고 소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일제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돌산이 수려한 곳이었지만, 일제시대 말기 속초항 공사로 모두 파괴되어 그 자취를 찾기 힘들어졌다고 하니 나라 잃은 아픔이 크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날은 더욱 어두워져 앞을 보기 힘들었다. 준비해 온 라이트를 달고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해가 지고 나니 어느새 한 낮의 더위는 잊혀져 갔다. 요즘 자전거 전용도로가 워낙 잘 되어있다고는 하지만 밤에 주행하는 건 여전히 위험성이 컸다. 하지만 동해 바다에서 일출을 꼭 보겠다는 일념으로 달렸다. 마음 같아선 정동진까지 내달리고 싶었지만, 남은 거리가 100km에 가까웠다. 속초항을 지나 속초시의 불빛 향연이 청초호에 비칠 무렵, 나는 설악대교를 막 지나고 있었다. 조금 더 지나니 낙산사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평생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저 지나갈 수 밖에 없었다. 화마로 소실된 건물들이며 나무들을 대신해서 새로운 건물들과 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안타까움이 여전했다.
어느새 양양 땅에 들어섰다. 두 다리는 이제 그만 좀 쉬자며 울먹이는 듯 했다. 도저히 더는 달리기 힘들었다. 이곳 저곳 텐트 칠 곳을 찾아 전전하던 끝에 하조대 캠핑장에서 자리를 잡았다. 몸은 이미 땀냄새가 가득했지만, 그보다도 눕고 싶었다. 사실 다음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무료 샤워장이 있었다. 서둘러 챙겨간 텐트를 설치하고, 고성에서 출발한지 10시간 만에 편히 누울 수 있었다. 몸은 피곤한데 여행으로 들뜬 마음 탓일까 잠이 오질 않았다. 아니 모기 탓이다. 숨어든 모기 한 마리 때문에 몇 시간을 잠을 설쳤다. 결국 붉은 선혈을 몇 번이고 헌납한 후에야 모기는 무거워진 몸뚱아리를 미쳐 피할 새도 없이 최후를 맞이했다.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2시간 뒤 날이 밝았다. 결국 밤 샜다…
8월 3일, 하조대에서 맞이 한 일출, 이글거리는 햇살에 바닷물이 젖어들 때, 한 폭의 수채화 속에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샤워장에서 어제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씻겨내고 텐트를 정리했다. 다음 행선지인 정동진을 향해 나아갈 차례였다.
이제 막 아침 조업을 마치고 항구로 돌아오는 어선들의 행렬과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이곳은 주문진 항이었다. 시간은 오전 6시였지만, 신선한 활어들과 각종 패류들이 즐비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선 밤샘 조업의 피곤함이 엿보였지만, 생계를 위해서 혹은 누군가를 위해서 그들은 오늘도 거친 바다를 향해 배를 몰아갈 것이었다.
주문진 항을 지나니 드디어 강릉 땅에 들어섰다. 그리고 맞이한 곳은 경포대였다.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다시 온 경포대의 모습의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엄청난 인파로 북새통이었다. 사람 많은 곳은 피하고 싶은 천성 탓에 서둘러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한참을 달리다 이번 여행의 난코스를 만났다. 줄곧 내리막 혹은 평지를 달렸는데, 오르막이 상당했다. 어제의 라이딩을 무리한 탓도 있어선지 오르막을 오르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눈 앞에 별이 보이는 듯했다. 물도 떨어져가고 배도 고프고, 그렇게 한참을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드디어 난코스가 끝나고 도착한 곳은 정동진!
정동진의 일출, 모래시계, 기차 정말 유명한 곳이 많은 정동진엔 역시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일단은 급하게 배부터 채우고, 탈수로 인한 갈증과 더운 날씨로 체온이 너무 올라간 탓에 머리도 어지러웠다. 편의점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마셔댔다. 겨우 진정이 된 후 정동진 역사에 들어가보았다.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과 저 멀리서 어딘가를 향해 달릴 기차의 굉음 소리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놓칠 수 없는 풍경들에 카메라 셔터를 쉴 새 없이 눌러댔다. 한참을 정동진 구경에 빠져있다 뒤늦게 시간을 너무 지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음 행선지까지는 자전거 도로가 개설이 되지 않아 기차를 타고 묵호 항으로 향했다.
묵호 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다음 행선지까지 쉴 새 없이 달려야 했는데, 묵호 항이며, 동해시의 전경을 놓친 게 너무 아쉬웠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도착한 곳은 추암 해수욕장이었다. 이곳엔 유명한 곳이 있는데 촛대바위였다. 과거 조선의 대표적 화가였던 김홍도도 이곳에 들러 한 폭의 그림을 남겼다고 하니 꼭 들르고 싶었다. 촛대바위는 생김새가 과연 촛대 모양이었다. 거친 동해의 풍파가 만들어 낸 걸작이었다. 푸른 바다 위에 솟은 한 줄기 촛대의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추암 해수욕장을 지나니 삼척시에 들어섰다. 드디어 이번 여행도 막바지에 다다름을 의미했다. 출발 전 계획한 일정대로라면 추암 해수욕장에서 또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애매했다. 오후 5시를 향해가고 있었지만, 날은 여전히 밝았다. 삼척시 임원까지는 40여 킬로가 남은 시점, 그냥 오늘 완주하기로 결심하고 서둘러 출발했다.
삼척 항을 지나다 걸어서 국토종주 중인 한 무리의 대학생들을 만났다. 8월의 한 여름, 저들도 나처럼 방법은 다르지만, 스스로가 선택한 고생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었다. 그들의 열정 어린 눈매에서 왠지 모르게 저들에게 지고 싶지 않은 경쟁심을 느꼈다.
삼척엔 공장들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 한국 지리를 배울 때면, 삼척은 석회암 지대라고 배웠는데, 이 때문인지 시멘트 공장이 대부분이었다. 이 역시 여행이 아니면 확인할 기회가 없었을 테니 여행의 장점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자전거로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충주에는 사과가 많다는데 과연 그럴까?” 직접 가서 보니 가로수가 온통 사과나무였고, “충북 보은은 고장의 특산물이 대추라는데 정말 대추나무가 많을까?” 과연 가가호호 대추나무가 천지였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관심도 두지 않는 구경거리일지도 모르지만, 여행하면서 이러한 사소한 것들조차 추억이 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게 있어 자전거 여행을 멈출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전 조사할 때, 삼척을 지나면 개 거품 물것이라는 얘길 듣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 이건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문경새재를 지날 때는 조령과 이화령 두 코스만 어떻게든 올라서면 내리막이 이어졌는데, 삼척은 오르막을 한참 올라 “이제는 내려가겠지..” 생각이 들 때쯤 다시 올라가야 했다. 도저히 자전거를 타고 올라갈 기운도 없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계속 달려야 했다. 혼자만의 싸움이 이어졌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누구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선택한 길, 나만이 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산 허리에 자리잡은 늦은 저녁의 밤길을 지나고 있을 때, 나는 문득 오늘의 달빛이 무척 밝음을 깨달았다. 자전거에 매달린 라이트 없이도 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왼편에 바다가 보였다. 멀리 해안가에 색색의 빛이 많은 것으로 보아 어느 이름 모를 해수욕장일 것 같았다. 이곳이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달빛은 바다에 닿아 일렁이고, 색색의 빛은 영롱하기까지 했다. 아무도 지나지 않는 이름 모를 산허리에서 한참을 달빛에 취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니 취한 건 나였음이 분명했다. 무릉도원, 우연히 마주친 이 날의 전경은 평생의 기억으로 남을 만 했다.
삼척시 끝자락에 위치한 임원, 도착하니 벌써 시간은 11시. 생각보다 험준한 산세 덕분에 꽤 시간을 지체한 탓이었다. 적당한 자리에 텐트를 치고, 공공화장실에서 간단한 세면을 마쳤다. 점점 잠에 빠져들 때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이 지나고 있었다.
8월 4일, 첫 차를 타고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임원터미널은 터미널이라기 보단 동네 슈퍼였다. 티켓도 옛 영화에나 나왔을 법한 종이 조각, 버스는 더욱 황당했다. 다른 곳을 거쳐 오는 버스였는데, 첫 차 표를 끊었음에도 다른 곳에서 만석인 채로 도착한 버스는 그냥 지나쳐갔다. 두 번째 버스가 왔지만 자전거를 싣는 사이에 또 만석… 어떻게든 타야 했다. 결국 삼척 행 버스 통로에서 내 돈 내고도 버스에 앉지 못하는 황당한 경험을 해야 했지만, 추억이라 생각하니 이마저도 우스워졌다. 혼자 시작한 여행… 돌아오는 길의 기억 속엔 혼자가 아닌 늘 누군가를 만나 함께했고, 때론 스스로와 싸우며 견뎌냈다.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닌 나, 동해안을 따라 시작했던 인생여정은 그렇게 수많은 추억과 한 단계 성숙한 나를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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